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900_04.jpg|width=100%]] || || 영국 국회 의사당 앞에 세워진 리처드의 기마상 || 전쟁에 관해서는 명실상부한 당대의 최강자였다. 흔히 그의 라이벌이자 호적수로 손꼽히는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궤멸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런 살라딘도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리처드를 상대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렇게 리처드가 회복한 프랑스령은 실지왕 존이 모조리 까먹고 만다.] 또한 리처드 1세의 무용담을 보면 단순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판단과 일신의 무용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소양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일단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참고로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3차 십자군이 결성하게 된 계기가 된 [[하틴 전투]]의 패배는 바로 보급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사막을 행군하는데 물이 부족했던 것. 사실 정확히는 살라딘이 티베리아스를 공격해 예루살렘 군을 일부러 물이 부족한 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그래서 티베리아스의 영주인 레몽 3세는 이를 눈치채고 자기 영지와 가족을 잃는 한이 있어도 공격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옹은 오히려 레몽 3세를 겁쟁이라고 비웃으면서 무모하게 공격에 나섰다가 말 그대로 말라죽었다.] 덕분에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상병을 무리하게 참전시키지 않고 회향시켜 전비를 아끼고 사기를 유지하고자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 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이처럼 리처드는 일신의 무예와 용맹도 대단했지만, 그뿐 아니라 전략·전술적인 안목에 있어서도 당대에는 따를 이가 없었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토머스 매든은 리처드 1세를 중세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로 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항우'''와 비교되는 무력을 가졌으니 얼마나 비범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살라딘이 전술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승리를 한 것도 재미있게 비교해볼 수 있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의 반대[* 당시 대부분의 십자군 지휘관들은 눈앞의 예루살렘을 버려두고 먼 길을 돌아 이집트를 쳐야 한다는 리처드 1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반대하였다.] 및 프랑스 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이집트 공략이 무산되자 과감하게도 예루살렘 점령을 포기하고 살라딘과 협정을 맺는 등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1s3250a|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 특히, 샤토 가야르에 물자와 식량, 식수를 가득 쌓아놓아 장기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당시, 샤토 가야르에는 수비 병력이 고작 400명~500명밖에 없었는데 무려 8개월을 버틴 것이다.][* 하지만 이 물자들은 어디까지나 성의 병력이 버틸 물자였기에 성 주변의 주민들이 성에 들어올 경우, 물자가 고갈될까 봐 샤토 가야르의 성주는 성으로 피신 온 성 주변의 주민 1,400명을 성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래서 주민들은 프랑스군에 항복했으나 프랑스군은 받아줄 여유가 되지 않은 터라 프랑스군에도 쫓겨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전장에 숨어 지냈으나 절반이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다. 나중에 필리프 2세가 군영에 도착했을 때, 숨어 있던 주민들을 보고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고 구제해준다.] 공성전의 대가인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6천의 병력으로 6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이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이 참으로 극적인데, 원래 이 성은 리처드 1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해 사실상 난공불락의 성이었으나… 존 왕 시절에 성을 개수해 [[화장실]]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수구가 드러났고 침투 방지용 쇠창살을 하수구에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덕분에 필리프 2세가 이 성을 공격할 당시에 8개월 동안 갖은 수를 써서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도저히 공략 방법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던 와중에 존 왕 시절에 개수된 하수구를 보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그곳을 기어 올라가게 했고, 분뇨로 범벅이 된 프랑스 병사들이 화장실을 통해 성 안의 예배당으로 출현해 영국군이 혼비백산한 사이, 침투한 프랑스군이 성문을 열어 리처드 1세가 그토록 아꼈던 샤토 가야르가 함락당했다. 이후, 필리프 2세는 치를 떨게 만든 이 샤토 가야르를 일부만 남기고 파괴하도록 지시해 그 이후로는 요새의 기능은 물론 도시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했다. 근본적으로 리처드 1세가 설계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약점도 없었지만 존이 손을 대면서 한순간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존의 무능력을 상징하는 사례로도 언급된다.] ||[[파일:external/givernews.com/chateau-gaillard-cormon.jpg|width=100%]] || || 샤토 가야르(Château Gaillard) || 당시에도 리처드와 3차 십자군의 무용담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나중에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 사로잡힌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이 거두어졌음에도 오히려 잉글랜드에서는 영웅적인 왕으로서 평가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인기는 1198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금을 거두자, 크게 낮아지게 된다. 이로 인한 당시의 기록은 인기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말해준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의 행로를 밟은 자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헨리 2세|헨리]] 왕의 사악함에 대해 떠들었고, 그에 대해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던가. 그 이후로도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던 이들은 이해심이 넓어졌다.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들은 헨리 왕의 훌륭한 치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비록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지금은 온 사방에서 뛰어나고 유익한 통치자로 인정받고 있다.''' >---- >뉴버그의 윌리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